마누엘 반 로겜의 SF 단편소설입니다.
작가님의 풍부한 상상력과 기발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퍼왔습니다.
문제가 될 시 삭제하겠습니다.
출처 : http://bbs.ruliweb.com/hobby/board/300145/read/22994351
[SF 단편] 짝인형(pairpuppets)
by 마누엘 반 로겜
에릭이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에릭은 창가에서 서서 멀리 아래로 펼쳐진 간척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늘어놓은 혁신된 방앗간과 가짜 농장들은 평소보다 더 매력이 없어 보였다. 그 무질서한 모습조차 신중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에릭은 지금이 인생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할 시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멀리, 지평선 위에 거대한 기계들의 윤곽이 보였다. 희미하게나마 윙윙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공장이 움직이고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그 기계들은 머뭇거리며 넘어가려 하는 석양을 모방이라도 하듯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외계의 침략자들이 보내는 비밀 신호같아."
에릭은 생각했다. 에릭은 그의 뇌 속에서 계속 흐느껴대는 생각들의 심술궂은 소리들을 내몰기라도 하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외계인들 생각을 하는 걸까?"
에릭은 발전소를 한 번 견학한 일이 있었다. 때문에 컴퓨터들이 유리 화면에 번쩍거리는 기호들을 그려 댄다. 그 거대한 방에는 살아 있는 생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치 소리가 들리는 미소처럼, 길들여진 원자력의 만족스러운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에릭 일행은 헤아릴 수 없는 추축과 굴대의 접합기들이 움직이는 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것이 움직임으로써 삶에 필수적인 모든 것들을 전국에 공급할 수 있었다.
인공적인 풍경과 교묘하게 결합된 여러 공장들이 가득 찬 광대한 공간. 에릭은 그런 광경을 보면서 느꼈던 희미한 두려움을 다시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빨리 그것을 떨쳐 버렸다.
이제 여자친구 티나와의 약속시간이 다가 오고 있었다. 이제 곧 찾아올 티나 생각을 하자 에릭의 몸은 욕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거의 느낄 수도 없는 미미한 권태가 희미하게 피어 오르자 그 욕망은 약간 무디어 졌다. 에릭은 티나의 몸이 주는 기쁨을 구석구석 샅샅이 알고 있었다. 마치 그런 기쁨이, 테이프에 천공을 해서(과거에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입력하던 방식) 그의 육욕적 감각기관에 조율을 시킨, 프로그램된 쾌락 유형의 결과이기나 한 것처럼.
"고정된 습관은 정열에는 해로워. 정말이지 이건 우리의 봉사 시간의 끝을 나타내는 징조야. 새로운 파트너를 구할 수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전혀 기쁘지 않아."
에릭은 생각했다.
에릭은 티나와 오늘 저녁에 짝짓기를 하가로 약속을 해놓았다. <성행위 참고서>의 3장에 설명된 대로, 30분간 손과 입으로 전희를 하겠다는 약속도, 예전에는 사람들의 짝짓기를 위한 욕망이 어떠한 훈련도 없이 고삐 풀린 광기처럼 분출되곤 했었다. 그 결과 많은 비참한 일이 생겼다. 지금은 아이들이 항문기를 벗어날 때부터 훌륭한 짝짓기 예절을 배우게 된다.
에릭은 자신의 몸에 성적 표지가 나타난 이후의 첫 번째 경험을 기억하며 약간 슬픔에 젖었다. 에릭은 운이 좋게도, 지혜롭고 어머니 같은 스승에게 할당되었다. 당시 에릭이 느꼈던 기쁨은, 종교의 전설을 다룬 책에 묘사된 고대의 성자들이 느꼈던 종교적 흥분과 비길 만한 것이었다. 에릭은 정열의 열기 속에서 그의 생각들이 녹아 내리던 뜨거운 오르가슴을 기억했다. 그의 몸은 하얀 심연으로 삼켜졌으며,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제 에릭은 티나와의 정중하고 능숙한 짝짓기에서 고통스럽게도 늘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었다.
티나는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에릭은 티나한테 포도주 한 잔을 따라 주고, 술을 마시는 티나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폈다.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티나는 나긋나긋하고 통통했으며,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눈은 컸고 거의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들창코에 넓고 푸짐한 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크고 건강했으며.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에릭은 이가 가지런한 여자를 좋아했다.
티나와 에릭은 동갑이었다. 에릭은 예전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 체계나 분별력도 없이 우연의 법칙에 의해 사랑에 빠짐으로써, 변덕스러운 호르몬의 노리개가 되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격한 광기는 끝없는 갈등을 낳고, 사람들로 하여금 법적결 혼이라는 덫에 빠지게 하였으며, 그 결과 그 짝을 불행하게 할 뿐 아니라 아이들도 신경증에 걸리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사회 전체를 붕괴시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반면 티나와 에릭은 정확한 방법으로 만났다. 일정한 반경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 둘은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간척지에 있는 컴퓨터 하나가 티나뿐만 아니라 에릭의 의식적, 무의식적 욕망, 외모, 지성, 취향, 감성 패턴 등을 고려한 결과, 두 사람이 짝을 지을 수 있다고 확인해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장 근본적인 측면에서의 상호 이해가 보장될 수 있었다. 티나는 에릭의 이상적인 짝이었다.
에릭은 잔을 들고 티나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티나는 웃음을 지으며 에릭의 축배에 화답했다. 이것은 다가올 일을 위한 완벽한 준비였다. 그러나 갑자기 에릭은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권태를 느꼈다. 에릭은 티나의 옷을 벗기면서 마치 정열 때문에 안달이 나는 것처럼 가장해 보려 했다. 심지어 티나의 일회용 종이 속옷 속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둘은 나란히 누운 뒤 지침서를 통해 둘 다 익히 알고 있는 동작들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릭은 흥분이 강해짐과 거의 동시에 권태도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그들의 사랑이 끝날 때가 왔기 때문이리라. 아주 짧은 순간, 에릭은 그들의 수습 기간의 절정이자 종결로서, 티나와 결혼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최종적인 거처를 정하고 살기에는 너무 어렸으며, 또한 남들이 대체로 결혼을 하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훨씬 못 미치고 있었다. 에릭은 신중하게 계획된 짝짓기를 계속해야 했다. 처음에는 느슨하고 짧게, 이어 점차 지속적인 조화를 가장 훌륭하게 보장해 주는 단계에 이르러야 했다. 그래, 이제 티나와의 일은 종말에 이르렀어. 아마 그래서 평소보다 티나의 욕구가 더 강한 것일지도 몰라. 에릭은 이미 힘이 빠지는 단계로 들어서고 있었다.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티나는 줄지 않은 욕망으로 아직도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다. 에릭은 비참한 기분을 느끼며 티나의 정열을 좇아갔다. 티나가 에릭의 곁에 누워 만족감에 젖어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 에릭의 생각은 이미 자신에게 할당될 새로운 여자에게로 가 있었다. 에릭은 또다시 여자의 개인적 희망과 특징을 고려해야 하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었다. 새로운 짝짓기 파트너들 사이에는 늘 상호 적응 기간이 있었다. 때로는 그 기간 중에 흥분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에릭은 그 생각에 짜증이 났다.
티나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티나는 이미 에릭이 잘 알고 있는 지친 몸짓으로 천천히 옷을 입었다. 그 지친 몸짓은 자신이 완전히 만족했기 때문에 팔을 들어올릴 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티나의 입가에는 씁쓸함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격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은 겉으로는 늘어진 몸을 가장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아직 다 소모시키지 않은 힘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에릭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티나 역시 이 상황을 기뻐하지 않는구나. 에릭은 티나에게 입을 맞추고, 티나는 작별 인사를 했다. 티나는 가기 싫다는 듯 오랫동안 에릭의 몸에 자기 몸을 밀착시키고 있었지만,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전해줄 만큼 오래 그리지는 않았다.
Ⅱ
다음에 만난 짝짓기 동료는, 지난 한 해 동안 에릭에게 생긴 지친 듯한 비꼬는 태도에 티나보다 훨씬 잘 적응해 주었다. 그 여자는 유머 감각이 풍부했으며 순종적이었고, 때로는 수줍은 태도로 노골적인 욕망 속에서도 겸손해했다. 그러나 에릭이 침대에서의 마지막 일격을 위해 여자를 충분히 준비시켜 주었을 때는 확실한 지배감을 드러내었다. 여자의 만족의 표시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었으나, 그 전 시기에 겪었던 그런 붕 뜨는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여자의 고삐 풀린 욕망의 분출은 계산된 과장의 측면이 있었다. 때문에 에릭은 자신이 능숙한 연인으로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여자는 일주일 후 에릭을 떠났다. 그때 처음으로 에릭은 컴퓨터들조차도 실수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경우에는, 후보자의 많은 정보 항목들을 서로 연관짓는 것이 불완전했음에 틀림없었다. 에릭은 체념하고 그 사실을 받아 들였으나, 실패했다는 느낌 때문에 계속 괴로워했다. 그 바람에 그의 우울함에는 날카로운 신경질이 보태지게 되었다. 그 여자가 남기고 간 잡동사니 가운데는 야한 색깔이 칠해진 팜플렛이 있었다. '좋은 짝 인형은 영원한 기쁨.' 그런 내용의 불타는 듯한 글자들의 표지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에릭은 그 팜플렛을 다른 것들과 함께 버리려고 하면서 생각했다.
"짝 인형이라. 자연의 제한된 쾌락에 만족하기보다는 만들어진 꿈에 속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보통사람들에게는 좋겠군."
그리고 떠난 에릭 자신도 그 팜플렛을 읽어 나갔다. 그걸 읽고 나서야 자신을 떠난 여자가 에릭의 제한된 능력보다는 짝 인형의 완전함을 더 좋아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에릭 같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예술적 정신을 가진 지식인들의 그룹에는 이런 저속한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짝 인형들은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좋은 것일 뿐이었다.
'짝 인형은 이상적인 침실의 동료다. 가장 최근판은 온도조절장치가 내장되어 있어, 흥분의 정도에 따라 피부의 온도를 조절한다. 움직임(구매자의 특별한 요구 조건에 맞추어 줄 수 있음)과 적절한 소리를 비롯해, 피부와 구멍의 습도 장치가 내장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확실하게 작동한다. 우리의 짝 인형들은 완벽한 짝짓기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만 자연적인 인간과 다를 뿐이다.'
또 전국 소비자단체에서 보낸 과학 보고서도 첨부되어 있었다. 남자와 여자들이 실험실에서 짝 인형들과 짝을 지어 보았다. 그들의 불만도 주의 깊게 조사되었으며, 그들이 느끼는 기쁨은 자원자의 몸 속에 장치한 극도로 민감한 장치에 의해 조직적으로 분석되었다. 자원자들의 욕망의 원초적 형태를 추적하기 위해 그들의 꿈까지 분석했다. 그 결과 자원자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를 각 성마다 4개의 표준적인 짝 인형 가운데서 고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 네 가지의 짝 인형들은 이상적인 전형을 대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짝 인형들이 인간 짝의 움직임에 적응하는 미세한 힘은 극히 만족스러운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들이 내는 소리도 실험 과정에서 녹음한 것으로, 울부짖는 것에서 신음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에릭이 처음에 그 팜플렛을 보았을 때 느꼈던 혐오감은 사라지고 대신 그리 편치 않은 성적 충동의 환상이 찾아오고 있었다.
에릭은 잠자리로 가면서 적어도 전시장에는 한 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다음날 아침까지 기억에 남은 꿈도 그가 결심을 굳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전시장의 영업사원은 예상했던 대로 친절하고 따뜻하게 에릭을 맞아 주었다. 전시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사업은 어떻습니까?"
에릭이 물었다.
"수요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영업사원의 당황한 목소리에서 에릭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업사원이 말을 이었다.
"짝 인형을 사용하는 일이 갑자기 유행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우린 전에는 한정된 범위의 사람들만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두 사람들한테 싫증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글쎄요,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손님, 짝 인형들은 사실 인간보다 훨씬 낫죠. 최근 모델이 출하된 이래, 짝 인형과의 경험은 서툰 쾌락에서 세련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업사원은 상품을 선전하는 사람답게 자기네 물건을 과장하여 좋게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목소리에는 진짜 열정이 담겨 있었다. 에릭은 선택을 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각 성마다 네 유형이 있었으며, 모두 가장 공통된 욕구는 만족시켜줄 수 있었다. 순종하는 여자 유형, 지배하는 여자 유형, 천천히 성적인 희열에 오르는 냉정한 미인 유형, 남자의 머리를 누일 수 있는 부드러운 피난처와 같은 따뜻한 가슴을 가진 소박한 어머니 유형 등 네 가지 여자 유형이 있었다. 반면 남자는 어깨가 넓은 운동가 유형, 부드럽고 아이 같은 남자 유형, 잔인한 연인 유형, 부드러운 헌신자 유형 등 네 유형이 있었다.
영업사원이 설명했다.
"이 기본적 형태들은 크기와 피부색을 달리해서 배달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짝짓기 방식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좀 특이한 유형, 예를 들어 곱추 같은 것도 있지요. 물론 그런 것은 훨씬 비쌉니다. 수요가 적으니까요. 일반적으로는 우리의 여덟 가지 유형이면 대부분 다 만족합니다."
"선택이 쉽지 않군요."
"대개들 그러시지요. 그렇다면 다 가져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때때로 변화를 주기 위해서 말이죠. 그게 훨씬 더 싸게 먹히기도 합니다. 이미 그렇게 세트로 판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고객들은 심지어 네 개가 아니라 여덟 개를 다 가져가기도 하더군요. 우린 무료로 유례없는 기술로 이루어지는 그룹 짝짓기에 대한 참고서를 끼워 드리지요."
에릭은 빨리 흥분하여 남자 쪽에서 육욕의 기술을 오랫동안 보여주지 않아도 쉽고 흐드러지게 절정에 이르는 좀 큰 빨간 머리를 골랐다. 또 천천히 절정에 오르고 많은 손길을 요구하는 조그맣고 수줍은 인형도 싸달라고 하였다.
집에 돌아온 에릭은 주의 깊게 아파트 문을 잠갔다.
III
에릭은 지금은 비록 자주는 안 만나지만, 대학 때부터 서로를 잘 이해해 온 가장 친한 친구 에버하드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했다. 에릭이 친구의 집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스위치를 끈 채 거실 한쪽 구석에 놓여진 두 개의 짝 인형이었다. 에버하드 역시 새로운 유행에 맛을 들인 적이 있다는 표시였다. 에버하드는 가구 배열도 바꾸고 놓고 있었다. 변하는 빛의 조각이 있는 폴리에스테르 벽, 발명가의 말에 따르면 창조적 벽판이라 일컫는 그 벽들은 거친 소나무 벽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방안에 송진 냄새가 가득했다. 향수를 뿌려 일부러 냄새를 나게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강했다.
"괜찮은 변화로군."
에릭이 첫 번째 잔을 마시며 말했다.
"약간 좀 거칠지. 아마 구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걸세. 다만 요즘은 이런 게 많아지고 있어서 오히려 새로운 유행이라 부릴 뿐이지."
에릭은 놀랐다.
"자네 그 동안 어디 있었나?"
에버하드가 물었다.
"대부분 집에 있었지. 더 나은 곳이 없더군. 난 자주 짝짓기를 했어. 그러면 별로 집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지."
에릭은 친구가 뭐라고 대꾸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에버하드는 말을 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따분하다?"
마침내 그가 물었다. 너무 교묘할 정도로 물었기 때문에 에릭은 의심이 되었다.
"그래. 어떻게 알았지?"
에릭이 되물었다.
"그거야 일반적인 감정이니까. 자네가 그렇게 이기적으로 방안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면, 자네도 금방 알 수 있었을 걸세. 그런 감정은 이미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어. 하지만 그런 걸 느끼면서도 아무도 그걸 고백할 용기를 갖지 못했지. 사람들은 다시 구식의 의사 소통 형태를 시작하게 되었네. 친구들과 약속을 하고, 정당을 조직하고, 심지어 거리의 낯선 사람들한테도 말을 걸게 되었지. 인간은 이상한 거야. 절대 만족하지 않거든."
에버하드는 친구와 자신의 잔에 술을 또 따르고는 말을 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아직도 짝 인형을 원해. 그것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 유형을 원하게 되지. 그러나 좀더 세련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미 뚜렷한 저항감이 생기고 있네. 지식인 계급은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지."
"취향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오늘 어떤 방식을 택하면, 내일은 대중이 그걸 따라하게 되지. 이제 곧 짝 인형들이 사라지고, 우리 모두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겠군."
에릭은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친구의 집을 나올 때 에릭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져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바깥에는 가을이 한창이었다. 이미 겨울 추위의 기색을 띠고 있는 신선한 공기에는 싸하고 매콤한 향기가 배어 있었다.
에릭이 몇 미터도 가지 않았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왔다. 에릭은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약간 놀랐으나 곧 기쁨의 감정이 밀려왔다. 처음에 에릭은 그 여자가 자신과 접촉하려 한다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몰랐다. 그러나 여자가 자주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고 일부러 에릭의 관심을 끌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에릭은 방향을 바꾸어 여자를 따라갔다. 뒷모습도 매력적이었다. 작은 몸짓에 검은머리, 가늘면서도 잘 빠진 다리. 여자는 몸의 균형으로 볼 때는 잘 만들어진 짝 인형과 비교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젊고, 아마도 욕망으로 가득 차있을,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순간 에릭은 갑자기 이 여자가 왜 자기한테 접촉을 시도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도 과거 사업상의 목적 때문에 거리를 배회하던 유형의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적 기술 없이. 이 여자는 내가 살아 있는 남자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야. 아마 자기 짝 인형들한테 싫증이 난 거겠지. 나 자신이 내 완벽한 욕망의 대상들에게 짜증이 난 것처럼. 에릭은 여자를 따라 갔다. 에릭은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금방 여자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에릭이 말을 걸자 여자는 웃음을 지었다.
"아마 내가 당신을 따라와 주기를 바란 것 같은데?"
여자는 청순한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을 만큼 젊었으며, 또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법한 나이가 들어 있었다. 에릭은 이런 여자에게 제일 끌렸다. 여자는 에릭의 손을 잡더니 이끌고 갔다. 에릭은 갑자기 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에릭은 그 동안 너무 오래 완벽한 기쁨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진정한 사랑이 얼마나 그리웠는가를 깨달았다. 그 동안 억눌렸던 애정이 분출해 나왔다. 에릭은 그의 몸 안에서 풀려난 그 강렬한 애정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 였다.
"이름이 뭐죠?"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는 점점 빨리 걸었다. 거의 뛰다시피 했다. 이제 에릭은 여자가 별로 아름답지 않다는 첫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좀 균형이 잡히지 않은 얼굴이었다. 코는 너무 길었고 입은 너무 컸다. 웃음을 지을 때 보니 앞니가 비뚤어져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불규칙한 생김새의 조합이 짝 인형들을 제조하는 부드러운 원칙보다 더 강렬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에릭은 여자의 피부가 너무 검고 또 너무 거칠며, 이마에 점이 하나 있다는 것에서도 실망이 아닌 기쁨을 느꼈다. 어쨌든 이 여자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외로 나가자 여자는 에릭을 마른 도랑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옷을 벗지도 않았다. 여자는 너무 급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직접적인 욕망이 너무 강해 예비과정의 세련된 즐거움을 누릴 여유가 없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서로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들은 서로의 욕구에 대해 개의치 않고, 동물처럼 빠르고 거칠게 짝짓기를 했다.
그것은 에릭에게는 엄청난 경험이었다. 이렇게 강렬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첫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제 에릭은 짝 인형들에게 가졌던 생각이 잠시의 오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불완전한 인간과 짝을 짓는 것만이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있었다.
에릭은 옆에 누운 여자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여자는 눈을 감고 부드럽게 숨을 쉬고 있었다. 에릭이 여자의 몸에 손을 댔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난 엘리예요."
여자는 따뜻하지만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새로 개선된 짝 인형이에요. 실험용이죠. 내 행동에 대해서 비판적 평가를 내려 주시겠어요? 그 말들은 녹음이 되어 참고가 될 거예요. 나를 여기 내버려두고 떠나도 되요. 도움 없이도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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